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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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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훈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친일 행위를 한 인물이다. 서울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중위로 임관했다. 훈장을 받았으며, 중일 전쟁 발발 후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으로 활동하며 지원병, 징병 등 태평양 전쟁 지원을 위한 언론 통제를 담당했다. 광복 직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여운형과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했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으며,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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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군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정훈
인물 정보
출생일1893년 5월 19일
출생지한성부
사망일불명
경력
최종 계급중좌
복무 기간1915년 ~ 1945년
참전 전쟁태평양 전쟁
기타
별명(없음)

2. 생애

서울 출신이라는 기록만 있을 뿐 생몰년과 본적지 등 정확한 신상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11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한 뒤 1919년 4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1913년 5월부터 11월까지 일본 제국 육군 제10사단 20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한 뒤 도쿄 헌병사령부에서도 근무했으며 나중에 가마(蒲)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925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1930년 9월 훈5등 서보장을 받은 경력이 있다.

1934년 9월부터 1937년 7월 전후까지 함경북도 회령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 소속으로 복무했고 중일 전쟁 발발 후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에 임명되었다. 보도부장으로서의 역할은 지원병, 징병, 학병 제도 홍보를 통한 태평양 전쟁 지원과 언론 통제였다. 일본군 현역 장교로 복무 중이던 1941년 8월에는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8년에 시행된 지원병제 공포에 즈음하여 《매일신보》에 이를 경축하는 글을 보냈고 지원병 모집을 위한 담화문을 싣기도 했다. 당시 계급은 소좌였고 조선군 보도반과 보도부, 병무부 소속이었다. 1942년 육군 중좌로 진급했고 1944년 초에는 조선군 병무부에서 복무했다.

유진오에 따르면, "일본말도 잘 못하면서 툭하면 '몇백 명만 종로 거리에 내다세우고 기관총으로 따따따 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5]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고하 송진우 등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며 치안권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는데 8월 14일여운형을 방문하여 엔도의 말을 전하고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시킨 사람이 정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광복 이후에 일본으로 귀환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이후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893년 5월 19일[1], 서울에서 태어났다.

1학년 재학 중이던 1909년 7월에 무관학교가 폐지되어,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 중앙 유년학교 예과 2년에 편입되었다.

1911년 8월, 유년학교 예과를 졸업하고, 9월에 본과에 진학했다. 1913년 5월에 본과를 졸업한 후, 사관 후보생으로 보병 제20연대에서 6개월간 근무했다.

1913년 12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1915년 5월, 제27기 보병과를 졸업한 후에는 교토 후쿠치야마의 제20연대에 배속되어, 6개월간의 견습사관을 거쳐, 12월에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19년 4월 15일, 보병 중위[2] .

1925년 5월, 훈6등 서보장 수훈.

1925년 8월 7일에 대위로 승진 후, 9월 15일부터 제20연대 대대 부관으로 헌병사령부 부임[3]

1928년, 교토에서 열린 쇼와 천황의 즉위례에서 특별 경비를 맡았다. 후쿠치야마에서 근무할 때, 그곳 경찰서장의 딸과 결혼했다.

1930년 3월 6일, 제20연대 중대장[1] .

1930년 9월, 훈5등 서보장 수훈.

1933년 3월, 육군 정기 이동에 따라, 함경북도 회령 주둔 제19사단 제38여단 보병 제75연대로 이동하여, 육군 소령으로 승진했다.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10월, 조선군 사령부 참모부에 조직된 신문반에서 활동했다. 신문반은 "조선인 사상 단체 및 일반 여론에 관한 조사, 조선어 신문, 잡지의 지도, 영화, 방송의 지도" 등의 업무를 담당했으며, 1938년 1월, "조선총독부 기타 관계 관청, 각종 국방 및 교화 단체와 협력하여 시국 인식 및 국방 사상 보급에 유감없이 여론의 일원화를 기하고, 군민 일치의 량(梁)이 되도록 매진"하기 위해 보도반으로 개편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조선군 사령부 보도부로 확대되었다.

1937년 2월 23일, 육군 특별 지원병 제도가 공포되자, 같은 날의 매일신보에 "충량한 신민"이 영예로운 국방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을 축하하는 개인 담화를 발표했다. 이후,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 신문과 잡지에 여러 번 기고하여, 조선인들에게 천황과 일본을 위해 지원병으로 전쟁에 나가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하고, 조선인이 일본 군인이 되는 것이야말로 내선일체의 구현이라고 강변했다. "내선 양 민족의 동근동조"라는 전제 하에, 지원병제가 실시된 것처럼, 조선인의 "민족 의식으로부터 민족 문화라는 사상을 청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38년 4월, 경성군사후원동맹이 주최한 중일 전쟁 1주년 기념 강연회의 강사를 맡았으며, 수송소학교에서 중추원 참의 김명준과 함께 강연했고, 같은 달에는 신도 및 숭신여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시국 강연회에서 "황군의 직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일본이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 내선일체를 확립하기 위해 조직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직접 관여했으며, 1938년 8월에는 손홍원의 주도 하에 "군관민의 심정을 소통하고, 시국에 대한 협력의 실을 거두고, 내선일체 운동에 박차를 가한다"는 목적으로 창설된 황도주의 단체인 목요회를 지도했다.

1939년 4월, 함경북도 청진, 나남, 웅기, 경원, 경흥 등을 순회하며 강연회와 좌담회를 개최했다. 같은 해 12월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조선군 보도부에서 경성부 중학생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원병 선전 강연회의 강사도 맡았다.

1940년 12월, 조선문인협회이광수, 박영희, 유진오 등 20여 명이 육군 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한 후, 좌담회를 갖도록 주선했으며, 1941년 8월, 조선군 사령부 보도부 소속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6월, 사에서 주최한 "조선 악극단의 황군 위문"에 관한 좌담회에 참석했으며, 8월에는 등이 황도 사상 보급 등을 내걸고 조직한 내선일체 운동 단체인 정학회에서, 경무국 보안과장이었던 요시카와 카네히데 등과 함께 장로로 추천되었다.

1942년 7월, 육군 중좌로서 신시대사에서 주최한 "징병제 실시의 의의와 반도의 책무를 말하다" 좌담회에 참여했다.

조선군 사령부 보도부장으로 근무하던 1943년 3월에 신시대사에서 주최한 "징병제 실시와 청소년의 연성을 말하다" 좌담회에 참여. 같은 해 말에는 병력 동원을 담당하는 조선군 사령부 병무부 소속으로 활동했다.

종전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가 있는 후쿠치야마에 살았지만, 그 후의 소식은 불분명하다.

2008년 4월 28일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기재[4] .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정훈은,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조선 주둔 일본군에서 복무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과 훈6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7년 10월부터는 조선군 참모부 신문반과 조선군 보도부에서 근무하면서, 식민지 조선 내의 언론, 문학, 예술 및 일반 여론에 대한 검열과 통제 업무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내선일체와 황민화에 관련된 문을 기사로 잡지에 게재하고,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역임하는 등 친일 단체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조선군 보도부에 복무하면서 '매일신보', '삼천리' 등의 신문과 잡지를 통해 지원병, 징병제에 관한 분을 다수 게재하고, 관련 좌담회에도 수차례 참여하는 등 조선인에 대한 병력 동원을 전국적 차원에서 선전, 선동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침략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는 이유로,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0호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및 제11호 "학병, 지원병, 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 제19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와 침략 전쟁에 협력하여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에 해당한다고 하여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일본 유학

정훈은 서울 출신으로, 정확한 신상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5] 1893년 5월 19일에 태어났다.[1] 1911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했다. 1913년 5월부터 11월까지 일본 제국 육군 제10사단 20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했으며, 도쿄 헌병사령부에서도 근무했다. 졸업 후에는 교토 후쿠치야마의 제20연대에 배속되어 견습사관을 거쳐 12월에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3] 이후 가마(蒲)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5]

1919년 4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2] 1925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3] 1930년 9월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5년 8월 7일에 대위로 승진 후, 9월 15일부터 제20연대 대대 부관으로 헌병사령부에서 근무했다.[3] 1930년 3월 6일, 제20연대 중대장이 되었다.[1] 1928년에는 교토에서 열린 쇼와 천황의 즉위례에서 특별 경비를 맡았으며, 후쿠치야마에서 근무할 때 그곳 경찰서장의 딸과 결혼했다.

2. 2. 일본군 장교 복무

정훈은 서울 출신으로 1911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했다. 1919년 4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으며,[2] 1913년 5월부터 11월까지 일본 제국 육군 제10사단 20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한 뒤 도쿄 헌병사령부에서도 근무했다. 가마(蒲)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다.

1925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 같은 해 8월 7일 대위로 승진 후, 9월 15일부터 제20연대 대대 부관으로 헌병사령부 부임했다.[3] 1930년 9월에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 1934년 9월부터 1937년 7월 전후까지 함경북도 회령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 소속으로 복무했다.

유진오에 따르면, 정훈은 "일본말도 잘 못하면서 툭하면 '몇백 명만 종로 거리에 내다세우고 기관총으로 따따따 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5]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이 나오기 며칠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송진우 등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며 치안권 인수 의사를 타진했는데, 8월 14일여운형을 방문하여 엔도의 말을 전하고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시킨 사람이 정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2. 3. 친일 행적

정훈은 서울 출신으로 1911년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했다.[1] 1919년 4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2] 1913년 5월부터 11월까지 일본 제국 육군 제10사단 20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한 뒤 도쿄 헌병사령부에서도 근무했으며,[3] 나중에 가마(蒲)라는 성씨를 가진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925년 5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1930년 9월 훈5등 서보장을 받았다.[4]

1934년 9월부터 1937년 7월 전후까지 함경북도 회령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 소속으로 복무했고 중일 전쟁 발발 후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에 임명되었다. 보도부장으로서 지원병, 징병, 학병 제도 홍보를 통한 태평양 전쟁 지원과 언론 통제를 담당했다.[5] 1938년에 시행된 지원병제 공포에 즈음하여 《매일신보》에 이를 경축하는 글을 보냈고 지원병 모집을 위한 담화문을 싣기도 했다. 1942년 육군 중좌로 진급했고 1944년 초에는 조선군 병무부에서 복무했다.

유진오에 따르면, "일본말도 잘 못하면서 툭하면 '몇백 명만 종로 거리에 내다세우고 기관총으로 따따따 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5]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고하 송진우 등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며 치안권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는데, 8월 14일여운형을 방문하여 엔도의 말을 전하고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시킨 사람이 정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4. 해방 이후

정훈은 서울 출신으로,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1919년 4월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2]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제19사단 보병 75연대에서 복무했고,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에 임명되어 태평양 전쟁 지원과 언론 통제를 담당했다. 1941년에는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8년 지원병제 시행 이후, 정훈은 《매일신보》 등에 글을 기고하여 지원병 모집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1942년 육군 중좌로 진급했고, 1944년 초에는 조선군 병무부에서 복무했다. 그는 "일본말도 잘 못하면서 툭하면 '몇백 명만 종로 거리에 내다세우고 기관총으로 따따따 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증언이 있다.[5]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전, 정훈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지시로 여운형에게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6] 광복 이후에는 일본으로 귀환했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포함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기재되었다.[4]

2. 5. 친일반민족행위자 선정

정훈은 서울 출신으로, 생몰년과 본적지 등 정확한 신상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911년 일본 유학 후, 1913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했다. 1919년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임관했고, 1925년1930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일본군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 소속으로 복무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장으로서 지원병, 징병, 학병 제도 홍보와 언론 통제를 담당했다. 1941년에는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역임했다.

1938년 지원병제 공포 당시 《매일신보》에 경축 글을 기고하고 지원병 모집 담화문을 싣는 등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1942년 육군 중좌로 진급했고, 1944년 초에는 조선군 병무부에서 복무했다. 유진오의 증언에 따르면, 정훈은 "기관총으로 따따따 해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5]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 며칠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지시로 여운형에게 치안권 인수를 제안하고 건국준비위원회와 합의를 이끌어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6]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환한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참조

[1]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昭和6年9月1日調 https://dl.ndl.go.jp[...]
[2]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大正13年9月1日調 https://dl.ndl.go.jp[...]
[3] 간행물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昭和2年9月1日調 https://dl.ndl.go.jp[...]
[4] 뉴스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http://www.ohmynews.[...] 2008-04-29
[5] 뉴스 동아일보 1974-04-19
[6] 웹사이트 조동호의 활동 -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설립 http://www.chodo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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